렌줄리의 영재성에 대한 정의와 우리의 영재교육

영재성(giftedness)의 정의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 영재란 뛰어난 능력으로 인하여 탁월한 성취를 할 것으로 전문가에 의하여 판단되는 자로서, 자신과 사회에 공헌할 수 있도록 정규학교 프로그램 이상의 교육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아동이다. - 라는 미국 교육부의 정의이다. 영재는 일반지능, 특수 학업적성, 창의적 사고 능력, 지도력, 시각 실연 예술, 신체운동 능력 등의 6개 영역에서 이미 높은 성취를 나타내었거나 잠재 능력이 있는 아동들이다. 이 정의는 영재판별의 기초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정의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사고의 과정과 산물을 혼동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79년 조셉 렌줄리(Joseph S. Renzulli) 교수는 미국의 교육 정책 관련 논문지인  『PHI DELTA KAPPAN』을 통해 「What Makes Giftedness? – Reexamining a Definition」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논문이 발표될 당시 미국의 영재개념은 지금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국한적인 영재개념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일반화 되어있던 영재의 개념은 루이스 터먼(Lewis Terman) 교수의 정의였는데, 그는 “Stanford-Binet Intelligent Scale 또는 이에 상당한 평가방법에 의해 일반적인 지적 능력에서 상위 1% 수준”이 영재의 범위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지금 한국의 영재 개념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렌줄리 교수는 위의 논문을 통해 보다 확장되고 포괄적인 영재의 개념을 주창하였는데, 그것이 ‘The Three-Ring Conception’이었다. Three-Ring Conception이란  “영재성은 평균 이상의 지능, 창의성, 과제 집착력의 상호작용”이라는 것이었다. 렌줄리는 세 가지 특성 모두에서 85% 이상이거나 적어도 한 가지 특성에서는 98% 이상일 때, 뛰어난 성취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이 정의에서는 과제 집착력과 같은 정의적 요인을 고려하였다는 점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평균이상의 지능 (Above-Average General Ability)
여기서 말하는 ‘평균이상의 지능’이란 우선 기존 영재개념에서 요구하는 철저한 시험 점수를 지칭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렌줄리 교수의 ‘The Three-Ring Conception’에서 이 요소는 상당히 제한적인 영역이다. 즉, 학업 성적에서 상위를 나타낸다는 것이 반드시 개인의 창의적·생산적인 성취도에 대한 잠재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교육 영역에서 학업 성적(지식)과 다른 요소들 사이는 비교적 독립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생산적인 사람의 대부분은 일반적인 시험에서 상위 95% 이상을 차지한 사람도, 그리고 지식을 받아먹는 것을 조금 일찍 알게 된 All-A 학생도 아니다. 만약 그러한 일괄적인 커트라인을 통해서 특수 교육과정을 제한한다면 그것은 우수한 성취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다.” 결국 렌줄리 교수의 주장은, 학업 성적이 영재를 결정함에 있어 당연히 일정 영역으로서 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지금 – 당시의 미국 – 과 같이 영재성을 전적으로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제 집착력 (Task Commitment)
여기서 과제 집착력이란 ‘동기’(motivation)가 정제되고 집약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사람들은 일반사람에 비해 더욱 자신의 직무에 대해 적극적이고 지향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자신의 독창성, 독립심, 개성, 열정, 결정력, 근면성에 대해 더욱 엄격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이 요소를 다른 일반적인 지적 능력처럼 쉽고 객관적으로 감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재성의 주요한 구성요소이므로 그 정의에 있어서 이것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의성 (Creativity)
영재성을 구성하는 마지막 요소는 창의성이다. 아마도 영재성을 정의내림에 있어 창의성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창의성은 흔히 생각의 독창성이나 문제에 대한 접근의 신선함, 그리고 기존의 고착된 관습들을 필요하다면 적절하게 제쳐둘 수 있는 능력 등으로 일컬을 수 있다. “흔히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타고난 재능이 있다’, ‘천재적이다’라고 감탄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영재성 중에서 창의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영재개념의 마지막 요소는 ‘창의성’(creavity)이란 말로 뭉뚱그려진 부분을 일컫는 것이다.“

나는 논의를 진행해가며,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협소한 영재의 개념을 벗어나, 보다 확장된 렌줄리 교수의 영재 개념을 수용하려 한다. 흔히 영재라고 하면 과학·수학 영재만을 떠올리기 쉽겠지만, 영재는 어느 분야든지 있게 마련이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반드시 영재는 아니다. 지능지수가 다소 낮더라도 운동, 음악, 미술 등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면 그 분야의 영재라고 할 수 있다. 또 대인관계가 뛰어나 또래를 이끄는 리더십이 탁월하다면 사회적 영재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Gifted Child’는 선천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그 재능을 사회적으로 표출하고 활성화시킨 아이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Talented Child’는 비록 아직은 가시적으로 재능과 창의성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교육을 통해 개발한다면 오히려 ‘Gifted Child’를 상회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다. 지금까지 그나마 미미했던 우리나라에서의 영재에 대한 개념이나, 또는 많은 학부모들의 인식이 바로 ‘Gifted Child’였던 것이다. 그 결과 영재교육을 소수의 엘리트 교육으로서만 인식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과 제도 속에, 우리는 수많은 ‘Talented Child’ 들을 잃어왔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과 창의성을 깨닫지도 못한 채, 소수의 특별한 ‘Gifted Child’ 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추구하고 있는 영재교육의 방향이 과연 ‘Talented Child’을 흡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미국 역시 조셉 렌줄리 교수의 영재개념이 발표되고 있던 1970 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와 같은 국한적인 영재개념과 평준화 정책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 초등학생들의 전반적인 학력저하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미국 당국은 영재교육의 필요성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1970 년대 말에서 1980 년대 중반까지의 미국 교육정책의 일로가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렌줄리 교수의 포괄적인 영재개념을 바탕으로 미국의 공교육제도 속에서 성공적으로 영재교육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에 렌줄리 교수의 영재개념을 도입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도깨비 방망이인 마냥 한국의 영재교육을 모두 성공적으로 바꿔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반드시 언급해야 할 문제는 바로 한국의 입시제도이다. 현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교육이 궁극적으로 일류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져왔던 많은 교육적 실험들이 결국 입시제도라는 난관에 부딪혀 그 효용성을 상실하고 흐지부지 되어버린 것도 사실이다.

영재교육은 절대 누구에게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이 소수를 위한 배타적인 특수교육의 형태로서는 결국 또 하나의 일류대 진학을 위한 공립학원으로 변질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 교육의 혜택을 받기 위해 더욱 더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형태로 왜곡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재교육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누구든 영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의 잠재력을 이끌어 줄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그래서 영재교육은 대중적이어야 하고, 공교육 속에 편입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생각을 조금만 바꿀 수 있다면, 10년 후 우리나라의 모습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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